이        름   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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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일의대수(一衣帶水)를 경계로 이웃한 우리나라와 일본.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양국의 관계는
삼국시대부터였다.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쌓이고 쌓인 우여곡절들이 발효되지 못한 채 부패의
과정을 반복해온 때문인가, 우리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일본의 이미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좀처럼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들과의 관계가 그저 현재진행의
‘스트레스’로 일관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끊일 날이 없었던 왜구의 침탈,
10년 가까이 전국토를 유린했던 임진과 정유의 난리, 40년 가까운 식민 지배 등 고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 순간도 그들은 악연(惡緣)의 이웃이었을 뿐 선린(善隣)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우리의 왕조들은 대부분 설득을 통한 교린(交隣)의 외교정책으로
금수(禽獸)의 의식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되던 이들을 상대해 왔다. 중국은 사대의 대상이었으나
일본은 교린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사대와 교린이라는 외교의 두 형태는 상호 위상의 차이로부터
생겨난 것일 뿐 각각의 경우에 파견되던 사절단 구성의 본질적인 차이는 없었다. 명·청 교체 이후
크게 변한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를 감안하면, 내면적으로는 양국에 대한 조선의 자세에도
큰 차이가 있을 수 없었다.
‘오랑캐 청나라’가 ‘중화의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원의 지배자로 등장하면서 존속되어오던
화이(華夷) 구분의 세계관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으며, 일본으로부터 임진왜란의 수모를
당하면서 ‘소중화적(小中華的) 자존의식’을 손상 받은 조선 역시 마찬가지로 세계관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사행록에 등장하는 견문의 내용은 다를 수 있어도, 중국과 일본에 대한
지식인들의 관점만큼은 일치했으리라 보는 이유도 그 점에 있다. 기록에 드러난 기록자의 시선과
세계관은 두 나라를 밟으면서 얻게 된 견문을 통해, 그리고 그런 견문들에 대한 그들 나름의 해석을
통해 소상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고려 말부터 일본에 사행을 파견해왔으며, 규모 면에서 본격적인 사행은 임진왜란 이후
19세기 초까지 12회에 달한다. 그런 사행들의 중심이었던 정사·부사·종사관·제술관 및 역관들은
당대의 지식인들이었으므로 사행 때마다 그들이 기록을 남긴 것은 당연하다. 중요한 것들을 들면
다음과 같다.

▪경섬(慶暹)(1607년 회답 겸 쇄환사의 부사)의 『해사록(海槎錄)』
▪오윤겸(吳允謙)(1617년 회답 겸 쇄환사의 정사) 의 『동사일록(東槎日錄)』
▪이경직(李景稷)(1617년 회답 겸 쇄환사의 종사관) 의 『부상록(扶桑錄)』
▪강홍중(姜弘重)(1624년 회답사의 부사) 의 『동사록(東槎錄)』
▪임광(任絖)(1636년 통신사의 정사)의 『일본일기(日本日記)』
▪김세렴(金世濂)(1636년 통신사의 부사)의 『해사록』
▪황호(黃호)(1636년 통신사의 종사관)의 『동사록』
▪조경(趙絅)(1643년 통신사의 부사)의 『동사록』
▪신유(申濡)(1643년 통신사의 종사관)의 『해사록』
▪남용익(南龍翼)(1655년 통신사의 종사관)의『부상록』
▪김지남(金指南)(1682년 통신사의 역관)의 『동사일록』
▪홍역관(이름 미상, 1682년 통신사의 역관)의 『동사록』
▪김현문(金顯門)(1711년 통신사의 수행원)의 『동추록(東楸錄)』
▪홍치중(洪致中)(1719년 통신사의 정사)의 『해사일록』
▪신유한(申維翰)(1719년 통신사의 제술관)의 『해유록(海遊錄)』
▪정막비(鄭幕裨)(1719년 통신사의 수행원)의 『부상기행(扶桑紀行)』
▪조엄(趙曮)(1764년 통신사의 정사)의『해사일기(海槎日記)』
▪김인겸(金仁謙)(1764년 통신사의 삼방서기)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이 외에 작자미상의 『계미동사록(癸未東槎錄)』 및 『일본일기』 등과 송희경(宋希璟)의
『일본행록(日本行錄)』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김성일(金誠一)의
『해사록』등 쟁쟁한 기록들도 빠뜨릴 수 없다. 사행 과정에서 견문한 것들을 일기체 형식으로
적은 것들이 대부분이며, 이것들을 모아 편집한 것이 바로 이 분야 연구의 결정적 텍스트인
『해행총재(海行摠載)』다.
기록자들은 대부분 당대의 지식인들로서 화이관이나 소중화 의식을 비롯한 지배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자유롭지 못한 존재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새로이 접한 이국의 문물로부터 각성과 의식전환의 단서를 터득하여 자신의 기록에 노출시킨 것이다.
자신들이 직접 목격하고 해석한 일본의 문물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 그것이 조선통신사 사행록의
문화적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1763년(영조 39) 계미통신사의 삼방 서기로 따라갔던 김인겸을 보자.
그 역시 처음엔 일본을 오랑캐로 생각하여 업신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오사카를 보고
묘사하기를 “우리나라 도성 안은/동에서 서에 오기/십리라 하지마는/부귀한 재상들도/백간 집이
금법이오/다 몰속 흙기와를/이었어도 장타는데/장할손 왜놈들은/천간이나 지었으며/그 중에  
호부한 놈/구리기와 이어 놓고/황금으로 집을 꾸며/사치키 이상하고/남에서 북에 오기/백리나
거의 하되/여염이 빈 틈 없어/담뿍이 들었으며/한 가운데 낭화강이/남북으로 흘러가니/천하에
이러한 경/또 어디 있단 말고”라 했으며, 나고야(名古屋)를 보고나서는 “육십 리 명호옥을/초경 말에
들어오니/번화하고 장려하기/대판성과 일반일다/밤빛이 어두워서/비록 자세 못 보아도/
생치가 번성하여/전답이 고유하고/가사의 사치하기/일로에 제일일다/중원에도 흔치 않으리/
우리나라 삼경을/예 비하여 보게 되면/매몰하기 가이없네”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뿐인가. 숙소인 본원사에 들어가면서도 “삼사상을 뫼시고서/본원사로 들어갈새/
길을 낀 여염들이/번화 부려하여/아국 종로에서/만 배나 더하도다/발도 걷고 문도 열고/
난간도 의지하며/…/그리 많은 사람들이/한 소리를 아니 하고/어린 아이 혹 울면/손으로 입을 막아/
못 울게 하는 거동/법령도 엄하도다”라고 그들의 질서의식에 대해서까지 칭찬했다.
이처럼 본래 왜인들을 ‘금수 같은’ 오랑캐로 생각한 김인겸도 일본을 지나면서 생각을 바꾸었다.
실제로 그들이 사는 마을의 제도나 형편이 생각보다 썩 훌륭했던 것이다. 소중화의 자존의식에
충일해 있던 김인겸 스스로 쉽게 할 수 없는 말을 아끼지 않으면서 ‘오랑캐 일본’을 추켜세웠다.
화이 구분의 대일 의식이 관념에 불과하고 현실적으로는 그들을 멸시해야 할 근거가 없음을
그는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아메노모리호슈(雨森芳洲)가 주창한 ‘성신지교린론(誠信之交隣論)’의
단서를 조선적 버전으로 바꾼 것이라고나 할까.
외교는 나와 남의 상호 소통행위다. 남을 통해 나를 아는 데까지 나가야 비로소 소통은
이루어지는 것. 통신사행에 참여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일본은 남이면서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었다. 당시에도 통신사행이 거쳐 간 지역들과 우리네 도시들 사이엔 같고 다름이
분명했을 것이다. 사람들도 모습은 같았으나, 말이 다르고 드러나는 성격 또한 달랐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말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만나 소통하는 일이야말로 외교행위 즉 ‘교린’의
중심이다. 그 옛날 일본인들은 조선통신사들을 만날 때마다 글을 받고자 애썼다.
글을 받으려는 일본인들 때문에 통신사 일행은 큰 괴로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손이 곱도록 붓을 휘갈기며 글을 써 주었다.
그처럼 상호 소통의 취지를 몸소 실천한 그들이었다.
                        ***

지금까지 이루어진 대부분의 연구들은 이 기록들에 대한 해석 혹은 그 체계화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내용 또한 문학·정치·경제·미술·사상·역사·외교·민속(풍속)·제도 등 다양한 분야들을 망라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일본 지역의 조선통신사 노정과 유적들을 답사하여 얻은 생생한 사진들을
마지막 권에 엮어 넣음으로써 이 총서는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학계의 발전과 후학들의 편의를 위해 논문의 재수록을 쾌락해주신 60여분*의 이 분야 석학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 꾸준한 보완작업을 통해 여타의 논문들도 빠짐없이 실릴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할 생각이다. 이미 ‘연행록연구총서’ 10권을 발간하여 학계의 발전에 기여한 바 있는
한국전통문예연구소에 조선통신사 사행록 관련 연구결과들도 묶어내라는  학계의 강한 요구가
있었다. 그러나 이 작업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상당 기간 진지한 고민과 검토의 과정이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2년 가까운 시간을 소비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이 기획은 햇빛을 볼 수
있었다.
투자되는 노력과 제작비에 비해 경제적 실익이 보잘 것 없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용단을
내려주신 학고방의 하운근 사장과 꼼꼼하고 야무진 손끝으로 책을 ‘이쁘게’ 만들어 주신
오행복 선생께 감사드린다. 필자 섭외, 원고의 수합과 정리, 교정 등 모든 일을 치밀하게 진행시킨
정영문 박사의 노고를 치하하며, 색인 작업을 도와준 김영덕·서수금·김성훈·장우석 등 학인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지금까지 나온 이 분야의 연구결과들을 집성하는 이 총서가 학자들의 안두(案頭)에 반드시
비치되어야 할 것으로 감히 자부하며, 이 총서를 ‘숭실대학교 한국전통문예연구소 학술총서 ④’로
명명하여 세상에 내놓는다.

무자년 첫날

한국전통문예연구소 소장  조규익 아룀

*참여 필자 명단
강대민, 강주진, 고순희, 구지현, 김경숙, 김덕진, 김동철, 김문자, 김보경, 김상보, 김성진,
김선희, 김재승, 김정신, 김태준, 노성환, 민덕기, 박균섭, 박우훈, 박재금, 박찬기, 박창기,
백옥경, 변광석, 소재영, 손승철, 송지원, 심민정, 양흥숙, 엄경흠, 오상학, 유재춘, 이동찬,
이민호, 이병휴, 이정은, 이진오, 이채연, 이혜순, 임종욱, 장순순, 장철수, 정도상, 정두희,
정성일, 정영문, 정응수, 정장식, 정한기, 정희선, 조 광, 조규익, 조영빈, 지두환, 최강현,
최종고, 하우봉, 한문종, 한승희, 한태문, 허경진, 홍선표, 홍성덕, 箕輪吉次, 오바타 미치히로,
岩方久彦


『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전 13권), 학고방, 2008. 52만원






學古房 / 200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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