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1차 탐서 및 전통문화 기행


글쓴이: 백규

등록일: 2002-06-27 12:15
조회수: 3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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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탐서 및 전통문화 기행

"더 이상 섭치란 없다"


일상을 툭툭 털고 길을 나서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이번 겨울엔 기필코 시계불알처럼 집과 연구실만을 오고가는 일상사의 고리를 잠시 끊어보기로 했다. 2월 9-10일 충남대 문과대 교수회의실에서 열린 '한국고전문학회'는 좋은 기회였다. 10일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11시 20분부터 1시간 동안 발표와 토론을 벌였다. 학회에서는 이현조본 <거창별곡>을 중심으로 <거창가>의 몇 가지 밝혀지지 않은 문제들을 발표했다. 지정토론자는 몇 가지 문제를 제기했으나, 그 내용은 내 논문을 誤讀한 데서 나온 둔사에 불과했다. 어쨌든 새로운 자료의 중요성과 그에 대한 분석의 타당성을 참석자들의 마음에 성공적으로 각인시킬 수 있었다. 발표하는 동안 거창가에 관한 내 연구를 책으로 묶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들었다. 핑계 삼아 이번 기회에 거창 땅도 한 번 밟아보기로 하였다.

학회 발표 후 점심을 얻어먹고 나니 오후 2시였다. 충남대 김선기교수 방에 있는 김팔남박사와 함께 백제당(대흥동:255-1727/유성:822-4877) 방문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탐서여행은 시작되었다. 온갖 골동품들의 은은한 미소 속에서 골방으로부터 꺼내온 책 상자를 열었다. 낙질이 많은 七書들과 家狀, 족보, 문집, 기타 필사본류가 한 박스 가득했다. 그러나 정작 찾고 있는 한글가사는 보이지 않았다. 사 놓으면 언젠간 쓸 날이 있을 듯 하여 박스째 사버릴까 하고 값을 물었으나 내 눈치만 살피는 주인은 좀처럼 속내를 보이지 않았다. 분명 쉽게 팔리지 않으리라 믿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탐서여행의 초장부터 마음에 들지도 않는 고서들에 비싼 '수업료'를 지불할 수는 없었다.

대전에서 1박한 다음 약속대로 이현조박사를 전주 터미널에서 만났다. 올 때마다 여유와 멋, 한가로운 고향의 정취가 느껴지는 도시가 바로 전주다. 이곳 전주에서의 첫 '전투'를 이박사의 지도 아래 시작하게 된 것이다. 터미널을 빠져나와 전주천을 끼고 잠시 달리니 완산교가 나왔다. 이 다리를 건너 용머리 고개를 넘자 골동품과 고서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근처에 다가공원이 있고,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완판본의 근원지란다. 그러나 막연히 이곳 어디에선가 판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만 할 뿐 그 정확한 위치를 알만한 증거물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고서에 해박한 곽재구시백은 이곳이 완판본의 근거지가 될 수 있었던 원인으로 "①종이, ②물, ③기능공, ④소비시장" 등을 꼽았다. 전주에서 만들어지던 한지는 질적으로 우수했고, 이 지역을 끼고 도는 전주천은 한지 제조에 필수적인 물의 공급원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관아에서 소용되던 많은 인쇄물들이 이곳에서 만들어졌으며, 그 官板 제조의 시스템과 우수한 인력 등이 이곳을 한국 인쇄의 메카로 만들어준 요인들이었을 것이다. 그와 함께 전주에 살고 있던 많은 식자들은 판본의 상당부분을 소비했고 그것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도록 자극했을 것이다. 물론 조선조 후기에 활발해진 서적 유통구조 역시 이러한 인쇄문화의 발달에 큰 기여를 한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곳 고서 유통의 대표라 할 수 있는 全州國寶古美術院에 자리잡고, 필요한 고서들을 수탐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박사가 주인과 주고받는 단수 높은 대화들을 통하여 고서 매매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따르는 심리전의 기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점포 이사 관계로 아직 끈조차 풀지 않은 책더미를 헤쳐보는 즐거움을 어디에 비할 수 있으랴. 책 먼지에 말아먹은 간짜장으로 허기를 달래며 서너시간 동안 우리는 십여건을 건지는 전과를 올리고, 광진당을 비롯한 다음 점포들로 이동하여 또 다른 전투를 벌인 다음 해질녘 광주로 향했다.

이박사가 사준 광주의 맛깔스러운 토속음식으로 배를 불린 다음 개미시장 근처의 갑을온천장에 여장을 풀었다. 개미시장으로부터 10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이 여관은 이른 아침의 출동을 위한 진지로는 제격이었다. 개미시장은 어떤 곳인가. 그 유명한 광주항쟁의 중심지, 금남로에 인접한 곳에 있었다. 이곳은 광주의 '인사동'이라 할만큼 골동품상, 고서상, 표구상 등이 밀집해 있는 이른바 문화의 거리다. 그 한 부분에서 토요일마다 서는 난전이 바로 '개미시장'이다. 이곳에서 취급되는 것은 80%이상이 우리나라 물건들이며, 한국 유일의 골동품 난전이기도 하다. 난전 맞은 편으로는 弘書閣, 古書堂, 고전방 등 내로라하는 고서방들이 즐비하다. 이곳에서 나는 수십년에서 수백년에 걸치는 나이의 책들이 내뿜는 뭉클한 냄새를 한 배 그득하게 마실 수 있었다. 곽시백과 이박사, 정일선선생 등의 관록에 심리전의 대가들이라 할 수 있는 古書商들은 꼬리를 내리기 일쑤였으며, 그 덕에 나는 비싼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었다. 이박사는 탐서 내내 "섭치란 없다"는 말을 되뇌이곤 했다. '섭치'란 무엇인가. '변변치 않고 너절한 물건'을 뜻하는 말이다. 보기에 따라 옛 초가집 흙벽의 도배지로 쓰이기에도 어려울 듯한 너절한 고서들도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에는 옛 사람들의 숨결과 손때가 서려 있으며, 어떤 서적이든 뒤적거려보면 가치있는 부분들이 분명 있다. 그러니 가치없는 고서가 더 이상 어디에 있겠는가? 고서 자체의 존재가 사라지려고 하는 마당이니 말이다. 하기야 어떤 고서점 책장 위에는 紙工藝 하는 사람들이 사가기로 되어 있는 여러 묶음의 고서들도 있긴 하더라만. 紙工藝家들이 내용을 확인할 이치도 아예 없으니 배배 꼬인 지공예품의 아픈 모습을 통해서나마 고서의 냄새를 맡게 될 날도 멀지 않았으렷다? "이젠 더 이상 물건이 안 나온다"고 내가 만난 고서상들은 이구동성으로 아우성이었다. 고서나 골동품이 간직되어 있을 법한 전통마을, 전통가옥 아니 전통을 소중히 하는 우리의 의식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는 한탄일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번 여행에서 찾은 강진의 골동품상 '돌방'의 주인은 이제 시골에 가도 옛 책을 살 수 없다고 하였다. 전 같으면 1, 2만원이면 무더기로 살 수 있었는데, TV에서 '진품명품'이 방영되면서부터 도무지 물건을 내 놓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에는 1, 2만원이면 살 수 있었던 물건들을 그들은 3, 40만원이나 부른다고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같은 책상물림들에게까지 '쓸만한' 물건들이 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온다 해도 그 '금값'을 어이 감당하리?

토요일(2. 12.) 새벽 5시쯤, 大魚를 건질 꿈에 잠을 설치던 나는 여관방의 구들장에 미련을 버리고 개미시장을 찾았다. 그러나 아직 어둑발이 진을 치고 있는 그곳에는 험상궂은 장승만이 버티고 서 있을 뿐 그리운 고서상들의 낯판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쫓겨 들어와 남은 잠을 청하는둥 마는둥 하다가 겨우 7시경에 광주옥의 콩나물해장국으로 시장기를 달랜 다음 본격 탐서에 나섰다. 얼마 후 서울에서 문학강연을 마치고 잠도 생략한채 눈을 비비며 쫓아내려온 곽시백, 딸나미의 유치원 졸업식을 마친 다음 서둘러 찾아온 이박사, 학교 수업을 마치자마자 달려온 정선생 등과 합류하여 본격적인 탐서에 나섰다. 이 분들은 모두 고서분야의 고수들이었다. 책 표지만 보고도 책의 내용이며 나이, 값어치 등을 훤히 알아맞추는 판이니 고서상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기색 또한 역력하였다. 狐假虎威라고, 나도 덩달아 자신감을 갖고 이 분들의 틈에 끼여 책들을 들추며 돌아다닐 수 있었다. 개미시장에는 눈에 뜨일 만한 물건들은 없었으나, 나름대로 중요한 책 몇 권을 비교적 싼 값으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특히 고전방에서 곽시백의 눈짓에 따라 기만원을 주고 산 퇴계선생의 목판본 {梅花詩}에 대하여 이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호리다시"를 외쳐댔고, 나 또한 흐뭇하였다.

이뿐이(입분이?) 아가씨가 써빙해주는 가마솥식당의 푸짐한 점심과 흑주 두어잔으로 배를 불린 다음 담양서적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고서방들을 들러 전에 사놓지 못한 몇 권의 책들을 더 사게 되었다. 평소 자린고비로 소문이 나 있다던 주인으로부터 매실차를 대접 받으면서도 연신 서가를 훑어나가는 고수들의 책 욕심은 놀랄만 하였다. 이 서점에서 우리는 고서를 다량 보유하고 있으며 모 대학에 다량의 고서를 납품했다는 김경욱선생도 만났는데, 그날 밤 여관방에서 우리는 이 분에 대한 이야기들을 안주 삼아 몇 잔의 술을 마실 수 있었다.

담양서적을 떠난 우리는 광주천 맞은 편 구동에 있는 곽시백의 작업실을 찾아 그곳에 진열되어 있는 고서들과 골동들을 감상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종이 노끈을 꼬아 만든 멍석 모양의 방석이 구들장의 한기를 막아 주었고, 벽장 가득 꽂힌 고서들이 대시인의 생각을 여유롭게 만들고 있는 듯 했다. 시인이 팩스로 받은 초고를 교정 보는 사이 우리는 값 나갈 듯한 고서들을 들추며 옛날과 지금의 시간대를 오고가는 희열을 맛볼 수 있었다.

시인의 작업실을 떠나 또 한 군데의 서점을 거친 우리는 대낮의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만찬을, 내가 좋아하는 담양에서 갖기로 하였다. 정선생의 힘좋은 차에 동승한 우리는 무등산 자락을 넘고 소쇄원을 지나 獨守亭 맞은편의 '푸른가든'에 도착하였다. 성산가단의 문사들이 함께 어울려 詩와 歌로 날가는 줄 몰랐을 이곳. 대낮이었다면 그 수려한 풍광을 안주 삼아 맹물만 마셔도 좋았을 것을, 깜깜한 밤중이라 안타까움이 더했다. 이 집에서 우리는 통오리 바비큐와 녹두죽, 흑주 두어잔으로 한껏 영양을 보충하였다. 입 안에서 살살 녹는 오리고기와 흑주의 감칠맛은, 수업료 삼아 내가 내겠노라는 고집을 꺾어버리는 곽시백의 다정한 마음과 함께 오래도록 내 기억중추에 남을 듯 했다.

여관에 돌아와 하루의 전과를 점검하며 정담을 나누다가 새벽 2시쯤 헤어진 후, 나는 단 몇시간의 단잠과 뜨끈한 해장국으로 피로를 풀 수 있었다. 원래 곽시백의 충고에 따라 88고속도로를 타고 대구로 가다가 거창을 답사하기로 정했었다. 그런데 해장국을 먹으며 생각하니 오늘이 바로 일요일 아닌가? 일요일날 거창에 가봤자 관공서나 학교 모두 쉬는 날일 터이니 이쪽 지방에서 하루를 더 소비하는 것이 현명할 듯 싶었다. 그래서 급작스레 변경한 코스가 "나주-강진-해남-진도-(해남)-(강진)-장흥-보성-순천-구례-담양-거창"이었다. 진도가 괜찮으면 거기서 1박을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내쳐 보성까지 갈 생각이었다. 보성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茶香이나 밤새 실컷 마셔보리라 마음 먹은 것이었다. 사실 속 마음으로는 고수들 몰래 고수들도 모르고 있던 남쪽 도시들의 고서방들을 개척해 놓으리라는 음흉한 계산도 한 편에 없지 않아 있었다. 더구나 나주, 강진, 해남이야말로 얼마나 전통 있는 도시들이며, 문화적으로는 또 얼마나 멋진 곳들인가. 날씨도 기가 막히게 좋았다.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남도의 들판에는 봄빛이 완연했다. 논두렁을 태우는 농부의 몸짓에도 흥이 배어 있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개미시장에서 산 책들, 이박사와 곽시백에게 빌린 책들이 트렁크에 그득하게 들어 있으니 내 마음도 덩달아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특히 이박사에게서 빌린 책들은 처음 보는 가사들이 대부분이라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무언가 손에 잡힐 듯한 느낌, 무언가 해 보리라는 투지가 마음에 차오른다. 그 때마다 이박사의 꾸밈없는 너털웃음과 누런 책표지들이 오버랩되어 차창에 어리는 것이었다.

나주, 영산포, 강진, 해남을 들러 제법 세밀히 뒤졌으나 강진에서 '돌방'이라는 골동품점을 발견한 것 외에는 전혀 소득이 없었다. 허허로운 마음으로 다산초당을 찾았다. 서너번 와본 곳이지만, 오늘따라 대나무숲은 더 빽빽하고 바람결은 더 깨끗한 듯 하였다. 다산초당 입구에는 예전에 없던 밥집과 다산선생의 수적을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집이 들어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길바닥에 농산물들을 늘어놓고 파는 아주머니들도 여러 명 보였다. 녹차 생각이 간절하여 녹차국수를 시켜 먹었으나 녹차맛은 입안에 남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해남을 거쳐 진도로 향했다. 진도대교를 건너며 잠시 낭만적인 분위기에 젖기도 했지만, 어둑발이 들 무렵 도착한 진도읍내는 내가 그리워하던 그 땅이 아닌 듯 했다. 길을 몰라 주춤대다가 길 가는 아저씨로부터 험한 눈길 세례를 받은 나는 그만 진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파출소로 들어가 골동품이나 고서방을 물으니 마음씨 좋게 생긴 소장님 왈 "이곳은 섬이라 그런 물건들은 읍지라이" 하는 말을 듣고는 다시 '해남-강진' 길을 되짚어 보성으로 갈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진도를 돌아나오는 길, 어둠 속에서도 벽파진 충무공 전적지의 푯말이 보였다. 그곳에 찾아 들어가니 과연 거대한 비석이 언덕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간단히 목례를 하고 다시 돌아나오니 사방은 칠흑처럼 깜깜했다. 그 밤을 달려 보성에 도착, 시내 한 복판의 귀빈장이란 간판의 여관에서 귀빈 아닌 내가 1박을 하게 되었다.

녹차 향기는 맡아보지도 못한 채 아침 일찍 도망치듯 차를 달려 순천시내로 들어가니 구례방면으로 나 있는 길가에 순천대학이 있었다. 순천대학에는 내가 연락하면 달려나올 교수들도 더러 있었으나 민폐(?)를 염려하여 일체 연락을 하지 않은채 잠시 캠퍼스를 거닐며 대학의 분위기를 느껴보기로 했다. 대부분의 지방 국립대학들이 그러하듯 널찍하고 한가로운 캠퍼스의 분위기가 부러웠다. 참새와 까치도 여러마리 날고 있었다. 한동안 걷다가 교수처럼 보이는 어떤 분에게 고서방을 물었으나, 그 역시 순천에는 고서방이 없다고 단언하였다. 왜 없을까마는 또 다른 사람을 붙들고 물어볼 수도 없어 그냥 다음을 기약하며 거창으로 달렸다.

11시경 거창에 도착했다. 우선 문화원을 물어 찾아갔다. 거창박물관 안에 문화원이 들어 있었다. 문에 들어서는 순간 "금일 박물관 휴관"이라는 팻말이 나를 실망시키고 말았다. 문화원에 들어서니 사무실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아침부터 웬 스님이 찾아오는가?"라고 생각하는 듯 뜨악한 표정들이었다. 이 사람들이 더 혼란스러워 하기 전에 나는 냉큼 내 신분을 밝히고 도움을 받으러 왔노라는 의사를 표했다. <거창가>를 설명하고 나서, 이 노래를 연구하여 책으로 내려고 준비하는 중에 거창을 직접 답사할 필요가 있어 이곳에 왔다고 하였다. 거창에 관하여 발간된 책자를 모두 얻을 수 없느냐고 했으나 겨우 {거창군사} 한 권과 다른 책들 두어권을 얻을 수 있었다. 사무국장의 안내로 전 문화원장이신 김태순선생(현 제창의원 원장)을 만나 뵙고 나서야 나는 거창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호인풍의 70대 노신사이신 김원장은 거창에서 17대째 살아오시는 토박이로서 거창 문화의 산 증인이었다. 평생 모은 유물들을 근간으로 거창박물관을 열었고, 환자를 진료하는 틈을 내어 거창 지역의 역사를 꼼꼼히 연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거창의 한우고기로 맛있는 점심을 대접 받고, 휴관일임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을 열게 하여 나를 직접 안내하셨다. 전혀 손상되지 않은 유물들을 보며 김원장의 애향심과 문화적 자긍심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거대한 크기의 채색본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으로 매우 인상적이었다. 김원장을 통하여 <산성일기>와 <난리가>를 얻게 되었을 뿐 아니라, 거창의 인문지리, 인물, 역사적 배경 등에 대한 설명도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이 분을 통하여 소중한 안내자 박기용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문학박사로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분을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눈매의 박기용박사와 말씀을 나누다 보니 처음의 직감대로 예사 인물이 아니었다. 거창문화에 대한 투철한 지식과 통찰력, 자신의 전공분야에 대한 신념, 앞으로의 할 일 등에 대하여 조리있게 설명했는 데, 말 마디마디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학교에 매여있어 자신의 공부를 마음껏 하지 못하는 박기용박사에게 나는 미안함을 여러번 느껴야 했다. 박박사의 차를 타고 대야리, 시항리, 개화리(인민사), 향교, 파리장서비 등을 답사했고, 개화리에서는 가사 기능보유자 오리꼴떼기(오리골댁) 할머니를 만나 노래집을 몇 권 얻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까지 가사를 창작하다가 얼마 전에 작고한 지산선생댁도 방문하게 되었다. 두 번이나 찾아갔으나 그의 아들인 문희봉씨를 만나지 못하고 서울에 와서야 그의 전화를 받았는데, 앞으로 박기용박사와 함께 지산선생이 남긴 가사작품들을 분류, 분석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저녁 8시쯤 박기용박사로부터 아름다운 이름의 아솜식당에서 거창 특유의 음식을 대접 받았다. 주인 아줌마에게 그 이름의 뜻을 물으니 아마도 "아름다운 솜씨"의 준말이 아니겠느냐고 재치있는 대답을 하였다. 거창에서 재배한 콩으로 만든 청국장과 나물 등을 이용한 비빔밥이었는데, 향과 맛이 독특하였다. 밥맛만 좋을 뿐 아니라 처음 만난 학문의 동지 박기용박사의 말씀들 또한 모두 새겨들어야 할 내용들이었다.

거창에서 하룻밤을 묵고 느긋하게 주변을 돌아보려던 나는 갑자기 머리 속에서 맴도는 몇 가지 아이디어들 때문에 흥분되어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었다. 빨리 집에 도착하여 이 생각을 구체화시켜야만 직성이 풀릴 듯 싶어 그날 밤으로 내쳐 서울에 도착하기로 했다. 구불구불 산길을 오르내리며 당도한 김천. 그 김천으로부터 경부선에 접어들어 날 듯이 달리니 드디어 서울. 그리고 새벽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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