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한 대학의 양식


글쓴이: 백규

등록일: 2002-06-27 12:13
조회수: 4050
 
한 대학의 양식


한 대학이 무슨 이유로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것이 실정법에 저촉되지만 않는다면, 타인으로서는 그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권리가 없다. 그러나 그런 결정이 시대정신이나 민족의 자존심에 약간이라도 손상이 될 수 있다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경우 아무리 자존심 강한 대학당국이라 할지라도 타인들의 말을 경청하는 아량이나 겸손함을 보이는 것이 옳다고 본다.

나같은 凡人은 이화여대가 이 시점에 김활란상을 제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다. 이화여대를 빛낸 별같이 많은 인물들이 있거늘, 굳이 친일행적이 모두의 뇌리에서 채 가시지도 않은 장본인을 이화여대의 이미지에 덮어씌워 온천하에 드러내려는 발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물론 본인 역시 아름답지 못한 과거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자고 주장하는 자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 일은 과거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일과는 성격이 다른 문제다. 엊그제 그 대학의 한 당국자는 김활란박사가 과거에 참회의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했다. 어떤 점에서는 그의 말도 맞다. 그가 참회의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인간적으로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적으로 용서했다하여 그를 한 대학에서 수여하는 상의 표징인물로 삼기에는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그 시상대상을 그 대학 학생들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더욱이 세계 여성들까지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거야말로 우리 모두 그 점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려해야 될 국가적인 문제가 아닌가? 상이란 무엇인가? 상식적으로 말하면, 특정한 면 혹은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될만한 인사에게 그의 장점을 선양하기 위하여 수여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그 상의 심볼이란 적어도 우리 모두에게 알려진 흠이나 문제점이 없는 인사여야 할 것이다. 학교당국이 굳이 지명도를 내세운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나라 대학들이 지금쯤은 그런 단견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최소한 무슨 대학에서 아무개를 기리는 상을 제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일반대중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의미있는 일이라고 본다. 커다란 흠이 드러나고 급기야 당국자들의 장황한 해명이 필요하다면, 그런 상을 굳이 제정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히려 상을 통하여 이미지를 높이려 한 대학에 심대한 피해나 자초하는 일은 아닐까? 만약 그 상의 제정의도가 우리의 불행했던 과거를 늘 회상하고 반성하며, 그를 통하여 바람직한 미래를 설계할 자료로 삼으려는 데 있었다면 필자가 지금 표현하고자 하는 우려는 말 그대로 기우에 불과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문제가 있는 듯하다. 보도를 보면 그 상을 통하여 그 대학의 존재와 명예를 대내외에 드높이자는 의도에 더 큰 비중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역사를 바로잡자는 말을 되뇌인다. 우리는 언필칭 역사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받지 못하는 국민에게는 미래가 없다고도 한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형틀처럼 지워진 과거역사의 멍에를 단 한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더 불행한 것은 그러한 일이 어째서 부당한지 깨닫지도 못한다는 데 있다. 더구나 대학에 몸담고 있는 인사들이 왕왕 이런 어리석음을 범하곤 한다. 이 시대의 올바른 국민의식을 이끌어야할 대학인들이 정신을 못차린다면 우리가 기댈 곳은 이제 어디란 말인가.

* 이 글은 1998년 미국에 있을 때, 김활란상 제정을 두고 벌어진 논란을 보면서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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