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가을밤, 곰보 스크린, 그리고 가족


글쓴이: 백규

등록일: 2002-08-08 06:58
조회수: 3405
 
가을밤, 곰보 스크린, 그리고 가족


울긋불긋 헝겊쪽 나풀대던 성황당, 그리고 검푸른 솔숲 너머 십리 거리에 판자로 얽어엮은 두어 동의 학교건물. 내 유년시절의 고통과 꿈들이 아스라한 추억으로 내 마음 속에 아롱져 있는 공간이다. 산 기슭을 울퉁불퉁 깎아 만든 운동장의 한쪽 면에 구멍 숭숭 뚫린 광목천을 내어걸고, 릴 소리 요란한 영사기를 갖다 놓으면 환상 속의 서사체험은 시작된다. 예닐곱 무렵부터 누구의 시혜였는지 우리는 1년에 한 번, 추석을 전후하여 학교의 마당에서 상영되곤 하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형이나 누나의 동행이 없으면 마당가의 변소깐에도 못 가던 나였으나 영화가 오는 날이면 그 오싹하던 성황당과 솔숲 10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김희갑과 김지미, 문오장, 허장강 등의 일거수 일투족을 침 흘리며 훑어내리곤 했다. 참으로 신기했다. 필름과 스크린이 낡아서 화면 가득 구멍 투성이요, 가끔 필름이 끊어지거나 자가발전기가 꺼져 관객들은 한숨을 쉬며 한참동안을 기다려야 할 정도였으나 그저 좋을 뿐이었다. 내가 밤마실을 갔다가 조금만 늦어도 불호령이시던 어머니께서도 영화만은 무조건 오케이이셨다. 어머니는 가마니를 짜시며 늦도록 기다리시다가 내가 돌아온 뒤 들려드리던 가슴 뛰는 영화 이야기에 재미를 붙이셨고, 관심 없는 척 하시던 아버지께서도 은근히 내 구변을 사랑하셨다. 이렇게 추석 전후 우리 가족은 우리 고장을 찾아온 영상예술의 전령사들 덕분에 화기로운 몇날을 보낼 수 있었다. 구멍 뚫린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서사구조는 내 미래의 삶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뻔한 해피엔딩과 권선징악, 그를 통해 영웅으로 등극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내 가슴을 공명심으로 가득 채우곤 했다. 그곳에서 한 번 상영된 영화는 다음 영화가 들어올 때까지 우리 꼬마 관객들의 입에서 떨어질 날이 없었다. 심지어 우리들 사이에서는 많은 내용들이 덧붙어 새로운 이야기들이 태어나기도 했다. 덩달아 우리네 가족들의 마음도 풍성해질 수 있었다.

최근 헐리웃 인근 도시에서 꿈처럼 주어진 미국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주말마다 센츄리시티 몰의 안락한 극장 AMC에 갈 궁리만 했다. 한 해 한 두 번 기십리 밤길을 걸어 운동장으로 향하던 그 옛날의 내 모습이나 AMC의 프로를 뒤지며 끈질기게 전화를 해대는 아이들의 모습이 닮았다 생각은 하면서도 푸대만한 봉지에 팝콘을 가득 담고 양동이만한 종이컵에 콜라를 가득 담아 든 채 안락의자의 편안함을 탐하는 즐거움이 그 옛날 자갈마당 위의 불편함보다 크게 낫다고 생각되지 않은 것은 왜 였을까? 아이들은 배우의 연기를 평하고 화면의 질과 스토리의 짜임을 비평한다. 그러나 뻔한 해피엔딩의 멜로 드라마에 길들여진 나는 그들과 아주 먼 거리에 있음을 문득 깨닫는다. 콧등 시큰한 이야기는 그저 교묘하게 설정된 복선과 기발하게 짜여진 이야기의 밀도에 있는 것이 아님을, 나는 짧지 않은 내 인생살이에서 느꼈고 그 지혜는 이미 내 유년시절의 엉성하던 우리 영화에서 터득한 바 있다!

때 맞추어 시드니 올림픽에 중추절이 닥쳐온다. 이런 때 우리의 때깔 고운 영화를 통하여 어긋나 있는 가족간의 주파수나 맞추어볼 일이다.

* 이 글은 영화마을 제 7권 9호(2000/9/1)의 권두 칼럼으로 실린 글입니다.
<2002.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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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희입니다.   2002-08-08 07:00:47 [삭제]
(저도 영화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감히 의견을 씁니다. 의견이라기 보다는 이야기가 되겠네요.)//영화. 어릴 적 영화광이신 아버지 덕에 전 본의가 아니게 꽤 많은 영화를 보았습니다. 극장에가서 본 건 아니고, 지금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당시 주말마다 TV에서 하던 주말의 영화나 토요명화를 보곤했지요. 보았다고 하면 저의 자발성이 포함된듯 느껴지시겠지만, 아니었습니다. 15평 남짓한 단칸방에서 4식구가 살던 때라 그 훤한 TV의 불빛과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는 저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은 푹 쉬는 주말이 저에게는 얼마나 싫었는지 모릅니다.//조금 커서 집도 사고 제 방도 생겼지만, 전 아버지의 영화보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자발성이 포함된 행동이었습니다. 비디오를 구입하고 나서 아버지께서는 일주일에 대여섯 편의 영화를 보셨고, 저도 그중의 반은 꼭 옆에 앉아서 보았던 것 같습니다. 꼭 명화라고 불리우는 영화만 본것은 아니었어요. 소위 B급 영화라 불리우는 것부터 삼류 영화까지..-학생의 신분이라 에로영화는 보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나중에는 비디오 가게 주인이 지나가는 절 붙잡고 `좋은 영화 나왔으니 빌려가라` 라며 손에 쥐어주기까지 했으니까요. 참 많은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플롯, 음악, 배우, 감독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몰입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요. 평가같은 것은 할 수 없었습니다. 살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평가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조금 더 커서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대학교에 들어오면서 전 영화와 많이 멀어졌습니다. 볼 시간이 없었던 것이지요. 생활에 쫓겨서, 입시에 쫓겨서, 사람에 쫓겨서.그랬던 것 같습니다. 느슨한 옷 차림에, 옆에는 마실 음료수를 놓고, 어두운 방안에서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싶네요. 예전처럼 그렇게 영화에 몰입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좋겠지요. 가끔씩은 `어깨에 힘을 빼고`있는 것도 괜찮을듯 싶습니다. 교수님도 그러고 싶지 않으세요? 그렇다면 한국영화인 `8월의 크리스마스`나 `미술관 옆 동물원`을 보세요. 전 그 영화들을 볼 때마다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주제넘은 이야기를 했네요. 워낙 여기에 의견을 남기는 사람이 없어서 교수님께서 이글을 언제 보실지 모르겠네요.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원문작성일 :: 2000/10/08 관리자에 의해 이전 게시판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김세희입니다.   2002-08-08 07:00:47 [삭제]
(저도 영화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감히 의견을 씁니다. 의견이라기 보다는 이야기가 되겠네요.)//영화. 어릴 적 영화광이신 아버지 덕에 전 본의가 아니게 꽤 많은 영화를 보았습니다. 극장에가서 본 건 아니고, 지금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당시 주말마다 TV에서 하던 주말의 영화나 토요명화를 보곤했지요. 보았다고 하면 저의 자발성이 포함된듯 느껴지시겠지만, 아니었습니다. 15평 남짓한 단칸방에서 4식구가 살던 때라 그 훤한 TV의 불빛과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는 저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은 푹 쉬는 주말이 저에게는 얼마나 싫었는지 모릅니다.//조금 커서 집도 사고 제 방도 생겼지만, 전 아버지의 영화보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자발성이 포함된 행동이었습니다. 비디오를 구입하고 나서 아버지께서는 일주일에 대여섯 편의 영화를 보셨고, 저도 그중의 반은 꼭 옆에 앉아서 보았던 것 같습니다. 꼭 명화라고 불리우는 영화만 본것은 아니었어요. 소위 B급 영화라 불리우는 것부터 삼류 영화까지..-학생의 신분이라 에로영화는 보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나중에는 비디오 가게 주인이 지나가는 절 붙잡고 `좋은 영화 나왔으니 빌려가라` 라며 손에 쥐어주기까지 했으니까요. 참 많은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플롯, 음악, 배우, 감독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몰입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요. 평가같은 것은 할 수 없었습니다. 살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평가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조금 더 커서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대학교에 들어오면서 전 영화와 많이 멀어졌습니다. 볼 시간이 없었던 것이지요. 생활에 쫓겨서, 입시에 쫓겨서, 사람에 쫓겨서.그랬던 것 같습니다. 느슨한 옷 차림에, 옆에는 마실 음료수를 놓고, 어두운 방안에서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싶네요. 예전처럼 그렇게 영화에 몰입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좋겠지요. 가끔씩은 `어깨에 힘을 빼고`있는 것도 괜찮을듯 싶습니다. 교수님도 그러고 싶지 않으세요? 그렇다면 한국영화인 `8월의 크리스마스`나 `미술관 옆 동물원`을 보세요. 전 그 영화들을 볼 때마다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주제넘은 이야기를 했네요. 워낙 여기에 의견을 남기는 사람이 없어서 교수님께서 이글을 언제 보실지 모르겠네요.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원문작성일 :: 2000/10/08 관리자에 의해 이전 게시판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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