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BK21과 학문 인프라


글쓴이: 백규

등록일: 2002-08-08 06:44
조회수: 2891
 
BK21과 대학사회


지금이야 사정이 많이 달라졌겠지만,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필자는 천재지변보다 오히려 농사짓는 사람의 조급증이나 어리석음 때문에 농사를 망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이런 일이다. 모를 심어놓고 한두 달쯤 지나면 논의 토양상태에 따라 검푸른 색깔에서부터 약간 노릇노릇한 색깔까지 얼마큼씩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그럴 때면 노릇노릇한 논의 임자는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검푸른 잎사귀들을 일렁이고 있는 옆집 논과 자신의 논이 너무 차이가 난다고 느낀 그 논의 임자는 특단의 처방을 내린다. 토질이나 벼의 품종, 물 관리 등 제반 여건은 생각지도 않고, 그 논들의 주인이 평소에 기울인 노력은 생각해보지도 않고, 당장 이웃 논들과 같아지거나 앞서려는 욕심에 그만 질소비료를 듬뿍 뿌려준다. 아다시피 농작물을 잘 생육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야 하며, 그 작업은 꾸준히 해야하는 일로 단번에 해치울 수 없다. 더구나 비료를 사용할 경우라도 비료의 삼요소는 질소, 인산, 칼리이므로 비율에 맞게 골고루 뿌려주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당장 겉으로 표가 난다는 이점 때문에 그 주인은 질소비료만을 듬뿍 뿌려준 것이다. 과연 2, 3일 후부터 그 논의 벼는 겉보기에 생육이 왕성해지고 검푸르게 변한다. 옆 논들과 비교해보며 그 논주인은 대단히 만족해하고 자랑스러워 한다. 그러나 얼마 후부터 그 논의 벼들은 저항력이 약해져 도열병을 비롯한 각종 병에 걸려 시름거리다가 결국은 형편없는 몰골로 전락하고 만다. 토질이나 농작물의 뿌리, 뼈대 등을 찬찬히 보강해나갈 생각은 못하고, 겉으로나마 우선 남과 뒤지기 싫다는 미련한 오기와 어리석음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만 것이다. 말하자면 그 농부는 질 좋은 퇴비를 이용하여 긴 안목으로 토양을 개선하거나 비료의 필수요소를 고루 사용하기보다는 우선 보기에 좋으라고 경우에 따라서는 농작물에 독이 될 수도 있는 특정 성분의 비료만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제3세계권의 한 국가에서 대학을 마치고 최근 BK21을 독식하다시피한 대학의 한 대학원에 재학하며 어떤 교수의 연구실에서 연구조교로 일하고 있는 한 젊은이를 만난 적이 있다. 나는 그로부터 한국의 학문적 수준에 대한 선망과 존경의 답을 기대하며 지금 공부하고 있는 곳의 형편을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그의 대답 때문에 놀라고 말았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교수들이 너무 많은 응용프로젝트들에 치중하는 까닭으로 연구실에서 그 일을 돕고 있는 자신들은 아주 바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배우고자 하는 기본원리나 독창적 지식을 배울 수가 없기 때문에 이 과정이 끝나자마자 이곳을 떠날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응용'이란 점잖은 말을 사용했지만, 그 말 속에는 "남의 연구업적 베끼기"라는 의미와 함께 그런 명목으로 엄청난 연구비가 낭비되고 있다는 현실고발이 함축된 말이었음은 물론이다. 우리의 학계가 가볍게 생각하여 마지않는 제3세계권의 학생 입에서 나온 이 말을 듣고, 나는 한 동안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가난한 인문학도에 비해 별세계에 살고 있는 듯한 이공계 교수들. 우리가 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공학을 육성해야 한다며 많은 연구비를 투입해오지 않았던가. 그와 같은 "베끼기(?)"의 작업들에 지금까지 투입된 천문학적 자금만으로 부족하여 국민의 세금까지 투입하려고 한단 말인가. 그리고 과연 이런 행태가 이 대학의 그 교수 한 사람에 의해서만 저질러지고 있는 것일까?

언론에 발표된 BK21의 내용과 그 예상되는 효과를 읽으면서 나는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 가운데 한 동안 내 입을 다물 수 없었던 사항은 바로 이것이다. 정확한 숫자는 기억에 없지만, 이 사업이 시행만 되면 1, 2년 내에 SCI 등재논문이 현재의 2배 이상으로 늘어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문헌에 등재될 만큼 "좋은 논문"을 두배나 더많이 생산해낼 수 있다는 말인지, 지금까지 생산은 되었으면서도 실리지 못한 "좋은 논문들"을 두 배나 더 많이 그 문헌에 실리게 할 수 있다는 말인지 알 수는 없으나 대체로 전자가 맞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차라리 그 돈으로 좋은 논문들을 "사다가" 그 문헌에 등재시킨다고 하는 게 좀더 합리적인 말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설혹 그렇게 하여 SCI 등재논문 수를 두 배로 늘린다 한들 앞에서 이야기 한 논 주인의 경우처럼 무슨 의미가 있는가. 기능올림픽에서 아무리 금메달을 많이 땄다 한들 과연 우리의 전반적인 산업수준이 그에 걸맞게 올라갔던가. 여기서 침대에 맞추기 위해 사람의 발을 잡아 늘이거나 자르던 '프로스크루테스의 침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공계 학자들은 모르겠으나, 필자같이 무능한 인문학도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앵겨준다 하여 지금까지 써오던 논문의 두 배를 같은 기간에 쓸 수는 도저히 없다.

지금 대학은 문제 투성이지만, 특히 학문 부진의 원인은 학문 인프라의 부실에 있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 몇 가지만 들어보자.

현재 강의실 환경(강의당 학생수, 소음의 정도, 냉난방 시설, 각종 강의 보조시설, 접근의 용이 여부 등), 연구실 환경, 도서관 환경(장서량이나 서비스 체계), 인터넷 등 통신망 환경(속도, 제공자료 등) 등이 과연 학문적 업적의 생산이나 소비에 타당하게 되어 있는가? 무엇보다 이들 문제는 시급하면서도 꾸준히 투자해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좋아하는 '단방식' 접근법으로는 개선될 수 없는 사항들이다. 그러나 긴 안목의 학문적 신장을 기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항들이기도 하다. 도서관을 예로 들어보자. 미국을 비롯한 상당수의 서구 국가에서는 ILL(interlibrary loan)제도가 오래전부터 시행되고 있다. 앉아서 타 대학 도서관의 자료를 대부분 빌려볼 수 있는 제도이다. 우리나라의 대학도서관들이 소장하고 있는 도서나 자료의 양은 참으로 공개할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수준이다. 그나마 국민의 세금으로 확충되는 국립대학들에 비해 사립대학들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그러니 ILL같은 제도를 도입하려고 해도 손해본다고 생각하는 대학들이 응하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다. 다른 대학으로부터 빌릴 일은 별로 없고, 내 장서나 자료들을 빌려줄 일만 많게 될 경우 누가 응하겠는가? 학점 교환같은 제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등한 차원에서 교류를 하고자 해도 우리 학생들이 상대방 학교로 갈 일은 적고, 상대방 학교의 학생들이 이곳으로 오기만 할 경우 누가 손해라고 생각할지는 뻔한 일 아닌가? 그러니 대학들마다 모두 울타리만 높게 올려치고, 남들과 협동하려는 생각을 안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학문적 성과의 빈약성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다. 만약 우리가 ILL같은 제도만 성공적으로 도입한다면, 빈약한 장서와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학들에게는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지금까지의 학문적 생산성보다 두 세배의 능률을 올릴 수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문제는 대학간의 격차를 어떻게 해소시킬 수 있는가에 있다. 이 점이 바로 BK21과 상충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특정 대학 하나만 육성하고 나머지는 내팽개친다면, 국가적으로 득될 것이 하나도 없다. 한정된 재원이지만, 학문적 인프라의 구축에 "골고루, 긴 안목으로" 투자한다면 결국 대학사회의 균형적 발전이 이룩될 수 있을 것이며, 이 가운데서 두드러진 대학들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지금 국가적으로 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대상은 바로 학문적 인프라의 강화와 내실화에 있다. 그것은 농사를 짓되 긴 안목을 가지고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일과 마찬가지의 일이다. 농작물의 잎사귀가 무성하지 않다고 당장 비료를 퍼붓는다면, 그 농작물은 허약해져서 금방 병충해의 공격을 감당치 못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학문적 업적이란 하루 아침에 급신장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의 일천한 대학사를 감안한다면, 지금 이 정도라도 향상되고 있는 것은 대견한 일이다. 한 두해 대학을 운영하고 말 것이라면, BK21과 같은 사업도 괜찮다. 그러나 이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학문과 대학은 영속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학문적 인프라의 구축과 강화에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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