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21세기 우리 학문의 방향


글쓴이: 백규

등록일: 2002-08-08 06:24
조회수: 3008
 
21세기 우리 학문의 방향-⑦인문학

상생(相生)의 시대, 그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며


대학의 개혁을 외치면서도 방향을 제대로 알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는 현실. 만연된 탈(脫)학문화의 역작용이 대학을 경박한 아마추어리즘의 향연장으로 만들어버린 현실. 세계와 시대의 변화에 대한 오독(誤讀)의 결과나 착각을 신념으로 위장하면서 한 시대를 잘못 이끌어가고 있는, 이른바 학계의 기득권 세력이 판치는 현실. 이런 현실 속에서 한국의 인문학은 고사되어가고 있다. 대학의 불변적 이념은 보편적 가치에 대한 신뢰와 추구다. 인간의 본질, 인간과 사회의 관계, 삶의 방법 등을 추구하는 분야가 인문학이라는 점에서 대학의 이념이나 정신은 인문학의 본질과 직결된다. 그런 점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학의 파괴는 인문학의 파괴 그 자체다. 그렇다면 인문학이 파괴되어가고 있는, 아니 대학이 파괴되어가고 있는 징후는 무엇인가? 인간을 무한한 가능태로 만들려 하지 않고, 1회용 도구로 양산해내려는 얄팍한 상업주의가 교육의 탈을 뒤집어쓴 채 대학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이 바로 그 징후다. 공동체의 해체나 이미 진행중인 교실붕괴 현상도 알고보면 인문학의 파괴에 큰 원인이 있다. 내가 누구이고 우리가 누구인지 애써 알려고 하지 않는 오늘날의 비극 역시 인문학의 파괴에 그 원인이 있다. 인간을 도구로 대하고 내 이익만을 추구하는 반 휴머니즘이 시대정신으로 정착되어가고 있는 근저에 인문학의 파괴라는 절망적 현실이 놓여있는 것이다.

21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겐 민족통일과 진정한 세계화의 실현이라는 두 가지 절체절명의 과제들이 주어져 있다. 학문, 특히 인문학만이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수단일 수는 없다. 그러나 진정한 인문학적 본질의 체득 없이 그런 일을 해낼 수는 없다. 도구로서의 기술과 기능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 위에서 비로소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보편적 가치에 대한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주어진 물리적 도구가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파괴로 연결된다는 점은 역사가 이미 입증한 바 있다.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정신체계가 바로 인문학이다. 21세기의 한국 대학은 자유와 조화 위에서 보편적 가치가 꽃피우는 현장이어야 한다. 본질학과 도구학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도구적 사고가 극성할 경우 시대를 이끄는 원천적 힘으로서의 정신은 빛을 발할 수 없다. 이 시대를 지배하는 천박한 이기주의와 상업주의는 정신문화의 퇴조를 불러올 것이고, 궁극적으로 그 담당계층은 역사적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고전 강의실을 가득 메우는 서양 대학들의 이공학도들을 보라. 서양을 추수(追隨)하려거든, 그 문명권의 본질을꿰뚫어보라. 이 시대의 반인문주의자들이여, 그대들은 이 땅에 무슨 파라다이스를 건설하고자 그토록 무모하게 애들을 쓰고 있는가?

피와 갈등으로 점철된 20세기는 상극(相剋)의 시대였다. 그 시기에 가장 쇠퇴한 분야가 바로 인문학이다. 21세기는 상생(相生)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 상생의 인문학이 활짝 피어나야 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환경, 문명과 문명이 서로를 살리고 공존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정계, 실업계, 교육계, 학계의 기득권자들은 더 이상 인문학을 말살의 대상으로 생각지 말아야 한다. 현재의 인문학도들에게는 무슨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릴 겨를이 없다. 우선은 처참하게 깨어진 인문학의 파편들을 주워모아 복원해야할 일이 급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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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기   2002-08-08 06:36:28 [삭제]
안녕하세요. 교수님의 방에 들어와 글을 써보기는 처음입니다. pc를 통해서 읽는 것도 낯설구요. 오늘 현대문학회 시분과에서 세미나를 했습니다. 교제는 민음사에서 출판한 고두현씨의 [늦게 온 소포]라는 시집이었습니다. 세미나를 하는 동안 서로 주고받았던 이야기가 相生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달과 아이들//아프리카에선 죽은 사람에게/달의 이름을 붙여준다./사람은 없고/달만 있다./믿을 수 있는 건 모두/하늘에 있고/아이들은/날 때부터/그렇게 배운다./사람보다는/사물에 더 자주 귀를 기울여라.//문득 읽기에는 `사람은 죽고 달은 이름을 얻는다`는 식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난 세기가 인간에게 집중되었던 세기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야기는 달라 진다고 생각됩니다. 지금도 그 연장선에 서 있기는 매한가지이지만...... 레비 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우리가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대해 다른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주변에 있는 것들, 꽃과 나무의 이름(존재)을 그들은 알고 있다고. 가끔 길을 걷다가, 산을 오르다가 저는 현대인의 무지에 대해 놀라곤합니다. `기계적인 것이외에 더 무엇을 알고 있을까`라고 자문해봅니다. `야만인보다 더 야만스러운 것은 아닐까`라고.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저는 어쩌면 이러한 `존재들`에 대한 무감각과 무감정에 의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아무쪼록 사람보다는 사물에 더 자주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원문작성일 :: 2001/09/02 관리자에 의해 이전 게시판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김점기   2002-08-08 06:36:28 [삭제]
안녕하세요. 교수님의 방에 들어와 글을 써보기는 처음입니다. pc를 통해서 읽는 것도 낯설구요. 오늘 현대문학회 시분과에서 세미나를 했습니다. 교제는 민음사에서 출판한 고두현씨의 [늦게 온 소포]라는 시집이었습니다. 세미나를 하는 동안 서로 주고받았던 이야기가 相生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달과 아이들//아프리카에선 죽은 사람에게/달의 이름을 붙여준다./사람은 없고/달만 있다./믿을 수 있는 건 모두/하늘에 있고/아이들은/날 때부터/그렇게 배운다./사람보다는/사물에 더 자주 귀를 기울여라.//문득 읽기에는 `사람은 죽고 달은 이름을 얻는다`는 식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난 세기가 인간에게 집중되었던 세기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야기는 달라 진다고 생각됩니다. 지금도 그 연장선에 서 있기는 매한가지이지만...... 레비 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우리가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대해 다른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주변에 있는 것들, 꽃과 나무의 이름(존재)을 그들은 알고 있다고. 가끔 길을 걷다가, 산을 오르다가 저는 현대인의 무지에 대해 놀라곤합니다. `기계적인 것이외에 더 무엇을 알고 있을까`라고 자문해봅니다. `야만인보다 더 야만스러운 것은 아닐까`라고.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저는 어쩌면 이러한 `존재들`에 대한 무감각과 무감정에 의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아무쪼록 사람보다는 사물에 더 자주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원문작성일 :: 2001/09/02 관리자에 의해 이전 게시판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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