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오십 보 백 보'의 난장판


글쓴이: * http://kicho.pe.kr

등록일: 2003-12-16 11:39
조회수: 2300
 
*이 글은 2003/12/16일자 조선일보에 실려 있습니다.

[시론] '진흙탕 개싸움' 대선자금

'오십 보 백 보'의 故事 … 10분의 1 안되면 깨끗한 건가


  
이 나라를 가까스로 지탱해 오던 최후의 제방이 드디어 무너졌다. “불법 대선자금이 상대방의 10분의 1 이상일 경우 대통령직을 내놓겠다!”는 대통령의 말은 제방 붕괴의 폭탄선언이다.

   "대선자금, 오십 보 백 보"

이 말 한마디로 돼지저금통을 앞세워 언필칭 청렴과 개혁을 부르짖던 집권세력의 도덕적 잣대나 양식의 수준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뿐인가. 어린애를 물가에 내 놓은 부모 심정이던 국민들을 아예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간 승자답지 않은 강퍅함으로 ‘죽은 권력’을 단죄하던 그들의 ‘헌칼’이 이 말 한마디로 드디어 그 허약한 실체를 드러내고 말았다. 줄줄이 잡혀가는 측근들의 범죄로부터 자신의 권력을 지킬 방도가 없었으리라.

그 자기방어 본능은 ‘아무리 오염되었다 해도 상대방보다야 나을 것’이라는, 청렴성에 대한 근거없는 믿음이나 강박증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의 ‘10분의 1’은 참으로 절묘한 숫자 놀음이다.

얼핏 그것이 붕괴되는 제방을 떠받쳐줄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과연 무슨 재주로 그것으로 막아낼 수 있는가. 제방이 무너지고 더러운 물이 쏟아져 내리면서 그 안에서 농탕치던 주역들의 몰골이 처참하게 드러나고 있다. 개중엔 온몸을 흠뻑 적신 사람들, 허리춤까지 적신 사람들도 있다. 물이 빠지면서 저수지 안에서는 ‘진흙탕 속의 개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가관은 좀 덜 묻었거나 덜 묻었다고 착각하는 존재들이다. 맹자(孟子)를 만난 양혜왕은 자신이 백성들에게 베푼 선정(善政) 몇 가지를 자랑 삼아 말했다. 그 때 양혜왕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기 위해 맹자가 들려준 것이 우리가 자주 쓰는 ‘ 오십보백보’의 고사다.

‘전투에서 오십보 도망 간 자가 백보 도망 간 자를 비웃는다면 되겠느냐?’는 촌철살인의 비유는 둔사(遁辭)로 어려운 국면을 바꿔보려는 대통령의 심중을 정확히 꼬집은 셈이다. 어쩌면 은폐의 제방이 터지는 걸 보면서 ‘도덕군자’로 표변한 꼴이라고 할까. 1억원을 ‘해 먹은’ 사람은 10억원 해 먹은 사람을 꾸지람하고, 10억원 해 먹은 사람은 100억원 해 먹은 사람을 욕한다.

이 땅의 도덕군자는 자신보다 더 많이 먹은 사람들을 신들린 듯 난도질한다. 자신 혹은 자기 무리가 그런 사람이나 그런 무리보다 청렴하다고 강조하면서 구경꾼들에게 박수쳐줄 것을 요구한다. 구경꾼들로부터 박수받을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는 그들이기 때문이다.

예부터 권력을 잡은 집단이 돈으로부터 깨끗해지기란 쉽지 않았다. 특히 왜곡된 근대 정치사에서 도덕군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흙탕물 속으로 빠져드는 예를 무수히 보아왔다.

  "10분의 1 안되면 깨끗한 건가"

정치인이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가 똑 같은 몰골임에도 처음부터 똑같은 존재들임을 애써 부인하려는 데 비극이 있다. 똑같은 흙탕물 속의 동지임을 깨닫지 못하고 ‘네 탓’만을 외쳐대는 데 더 큰 비극이 있다. 지금 그들 모두가 담합한 것처럼 정치판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에 머뭇거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체로 이 시대의 독선이나 독재는 ‘나만은 깨끗하다’고 외치는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그 독선마저도 ‘10분의 1’을 언급한 대통령의 실언으로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대통령은 스스로 진정한 참회를 해야 할 때 남에게 손가락질한 셈이 되고 말았다. 경우에 따라 낙마한 후보는 감옥에 가면 그만일 수 있지만, 현직 대통령은 10분의 1이든, 1백만분의 1이든 조그만 불법이라도 나오면 한없이 죄 값을 치러야 하는 자리인줄 깜빡 잊었던 모양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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