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기초학문 죽여놓고 나라 발전 기대할 수 없다


글쓴이: 백규 * http://www.kicho.pe.kr

등록일: 2002-09-09 02:47
조회수: 2835
 
* 이 글은 <자유공론> 2002년 5월호의 특집(한국교육의 빛과 그늘)에 실린 글입니다.





기초학문 죽여놓고 나라 발전 기대할 수 없다
- 기초학문은 응용학문과 삶의 바탕이다.


기초학문의 부실과 학문의 붕괴

기초학문은 모든 학문의 출발이자 한 국가의 학문적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다. 기초가 바로 서야 국가와 사회가 바로 서듯, 전반적인 학문체계의 정립은 기초학문으로부터 시작된다. 기초학문의 부실이 학계를 공허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불행히 우리나라에서 기초학문은 거의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얼마 전 서울의 한 명문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중국의 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동료들과 함께 연구실에서 교수의 프로젝트를 거들고 있다는 그는 그로부터 얼마 뒤 필자에게 “날밤을 지새우며 매달리는 작업이 남의 이론이나 베껴먹는 일이니 더 이상 이곳에서는 배울 게 없다.”는 충격적인 말을 남기고 미국으로 떠났다. 중국에서 공부하다가 선진학문을 배우고자 이곳에 건너 왔으나, 그는 그의 표현대로 ‘응용학문이라는 미명 아래 잘 베껴먹는’ 현장만을 목격한 것이었다.

창조적인 연구를 하기보다는 거액의 연구비를 ‘무리없이 따내는 일’에만 주야로 골몰하는 이곳의 현실이 그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던 듯 하다. 그러나 그가 질타한 그곳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최고 명문대학 가운데 하나가 아니던가? ‘이 대학이 이럴진대 여타 대학들은 과연 어떨까?’ 하는 의문을 그는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경험이 단편적인 것인만큼 일반화시켜서는 안될 것이고, 또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러나 지금 대학가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또 다른 사례 하나. 얼마 전의 일이다. 교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서울의 한 사립대 총장이 대놓고 한 말은 쉽게 잊을 수 없다. 시대가 바뀐 만큼 거액의 프로젝트를 따온 교수나 분야에 대해서 특별대우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 그러니 학교의 차등 지원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지 말아달라는 요지의 선언이었다.

오도된 신자유주의와 기초학문의 몰락

응용학문의 홍수 속에서 기초학문이 고사되어가고 있는 현장이 바로 우리의 대학임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앞의 두 사례는 공통된다. 현실적으로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학문의 방향은 돈줄인 기업과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는 정부가 좌우한다. 이 정부가 출범하면서 줄곧 강조해온 신자유주의의 정책 기조가 망쳐놓은 분야들 가운데 교육과 학문은 가장 두드러진다.

이른바 수요자 중심의 정책이 그것인데, 교육의 수요자를 잘못 잡은 것은 그들의 실책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진정한 교육의 수요자는 학생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 국민이다. 이 점은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는 비전 위에서 교육의 정책을 결정하고 시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모르는 지식은 생소하고 어려운 법이므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학습자는 쉽고, 편하고, 재미있는 과목들만 원하게 되어 있다. 교육정책당국이나 대학은 학생들의 기초를 튼튼하게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국가와 사회의 수요란 바로 그런 것이다. 현재와 같이 모든 것을 학생들의 취향에 맡겨서야 어떻게 균형잡힌 교육을 시킬 수 있겠는가.

그 뿐 아니다. 지금은 거의 실패한 것으로 판명나고 있지만, 무늬만의 학부제를 강행한 것도 기초학문의 붕괴에 결정타를 날린 근본원인이다.

상호 보완적 관계인 기초학문과 응용학문

기초학문과 응용학문은 경쟁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의 관계다. 기초학문을 중심으로 대학이 출발되었으며, 아주 오랜 뒤에야 응용학문이 대학에 편입된 사실만 보아도 대학의 본질은 기초학문의 연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기술분야나 응용학문이 뒤늦게 기초학문의 전당으로 들어오게 되었을까?

말하자면 단순한 ‘기능인’으로는 변화에 적응할 수 없고, 더욱이 창조활동을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능만을 필요로 한다면, 그리 긴 세월의 교육은 하지 않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교육을 대학에 맡겨 긴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창조적인 인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물건도 ‘내 것’을 만들어 팔아야 큰 돈을 벌 수 있다. 남의 물건을 베껴 만들면 당장은 몇 푼 벌지 몰라도 몇 발짝 못가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결국 계속하여 남의 물건이나 베낄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기업이나 정부가 ‘긴 안목’을 갖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당장 써 먹을 수 있는 사람만 원한다. 최근 어떤 회사는 대학에 ‘주문교육’ 혹은 ‘맞춤교육’을 제안했다. 말하자면 그들이 즉각 써먹을만한 ‘기능인’을 요구한 셈이다.

기능인이란 당장의 수요에는 부응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인 ‘확대 재생산’에는 부적합한 인간형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임에도 정부나 대학당국은 대학을 기초학문과 응용학문의 경쟁체제로 만들어 놓고, 시장의 원리만 강조한다. 돈을 놓고 두 분야가 경쟁한다면 기초학문이 어떻게 응용학문을 대적할 수 있는가? 철학 부재의 기능주의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현실에서 조만간 기초학문은 전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입학문의 응용 혹은 베끼기를 통해 기업이나 정부의 돈을 독식하고, 대학의 지원까지 받아 많은 수재들을 끌어 들이며, 대학의 권력 또한 그들에게 장악되어 있으니 말이다. 더욱이 학점, 시설, 교수 등 모자라는 것들 투성인데 기초학문을 배려할 여유가 있을 리 없다. 그 와중에 기초학문이 설 자리는 어디란 말인가?

기초학문의 보호와 학문적 자립

인문사회계나 자연과학계를 막론하고 기초학문이란 실용학문 혹은 응용학문의 바탕이다. 기초학문의 발전 없이 응용학문의 발전을 바랄 수는 없다. 기초학문이 토양이나 뿌리, 혹은 줄기라면, 응용학문은 열매다.

지금의 정부나 기업, 대학들은 토양과 뿌리, 줄기를 튼튼하게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부실한 열매만 바라보며 한탄하고 있다. 온통 열매만을 따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 그 열매를 아름답고 실하게 해줄 뿌리나 줄기, 토양에는 신경을 쓰려고 하지도 않는다. 토양이 척박하고 뿌리가 부실한데 좋은 열매가 열릴 수는 없다. 비료가 부족하다면 열매를 떨어뜨려 거름으로 쓰는 과단성도 필요하다.

이 정부에게 학문정책이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지만, 학문과 무관하지 않은 교육정책마저 모두가 ‘부실한 열매’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응용학문은 특별히 지원하지 않아도 자생력이 있고, 사회적 수요 또한 충분하다. 그러나 기초학문은 그 응용학문을 위해서라도 ‘보호되어야’ 한다. 말만이 아닌 정책적 보호가 있어야 한다. 응용학문과 기초학문이 경쟁구도로 짜여져 있다면, 즉각 원상태로 돌려져야 한다. 이 나라 최고 명문대학의 기초학문 박사과정 입시가 정원에 미달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모든 대학들에서 매 학기 초 단골로 나붙는 폐강과목 리스트는 거의 대부분 기초학문 관련 과목들이다.

정부와 대학이 표방하는 시장경제의 원리가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다면, 기초학문은 수년내에 대학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럴 경우 대학은 기능공 훈련소로 전락될 것이며, 그토록 긴 시간 큰 돈을 들여가며 자식을 대학에 보낼 국민 또한 없게 될 것이다. 기초학문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사회의 인재들은 창조력이 결여된 기능인 이상은 될 수 없으며, 우리나라는 영원히 학문의 수입국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창조적인 역량의 집결체가 바로 학문이다. 수입학문이 판을 치는 것은 그 수입상들의 영향력 때문이다. 그런 영향력은 당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손들에게로 대물림된다. 새로운 세대에게 창조의 당위성이나 자립정신을 심어주지 못하고 늘 남의 것이나 베끼게 만드는 역사의 죄업은 당대로 그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정신적인 식민상황을 유전처럼 대물림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우리의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이루어본 적이 없다. 우리가 정치∙외교∙군사적 측면에서만 외부로부터 침탈을 당해온 것은 아니다. 우리 손으로 우리 나름의 학문체계를 이루어본 적이 없다는 것은 외세에 의한 침탈과 맞먹는 비극이다. 남의 이야기에 의지해서 나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하고, 남의 아이디어를 배워다가 내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비극은 가급적 빨리 청산되어야 한다.

물론 “기초학문이라고 모두 내 것 뿐이냐?”는 반론도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남의 것이라 해도 기초학문은 사람을 반성하고 사색하게 만드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모든 창조행위의 싹은 자아성찰로부터 시작된다. 역사의 마디마디에서 삶의 모습을 바꾼 대발견이나 패러다임의 변화는 기초학문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하버드대학의 전 총장 닐 루덴스타인 박사도 몇 년 전 우리나라를 방문한 자리에서 순수한 배움의 욕구를 바탕으로 집중적인 기초학문의 연구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엄청난 사회적∙인간적 가치를 지닌 발명들이 장차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고도 정보화 사회와 기초학문

인문사회 분야의 기초학문은 정신적 성숙도를 높여줄 것이며, 자연과학 분야의 기초학문은 응용학문의 직접적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절대 빈곤의 시대인 60년대 이후 개발의 시대인 7, 80년대에 이르던 기간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그런 문제를 얼마간 해결한 지금까지도 기초를 다지는 일에 여유를 갖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은 누가 보아도 이해될 수 없으리라. 먹고 살기에 바빠 앞 뒤 가리지 못했던 과거를 성찰하면서 새로운 단계로의 도약을 시도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기초학문을 고사시켜가면서까지 응용학문 일변도의 학풍을 불러 일으킨다면, 그것은 삼사십년 전 절대빈곤의 시대에 경험했던 정신적∙문화적 컴플렉스가 새로운 버전으로 우리 앞에 재현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기술이라도 배워두는 것이 밥 먹고 살아갈 유일한 방도였던 60년대의 사고방식에 의해 지금의 번영을 이루었다 해도, 지금은 분명 그 시절과는 다른 시대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 상태를 뛰어넘어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려면 또 다른 사고의 패러다임이 필수적이다.

제대로 된 기초학문이나 그에 바탕을 둔 교양은 인간을 무한한 가능태로 만든다. 동기 부여 여하에 따라서는 어떤 일에도 적응할 수 있는 융통성과 능력을 갖춘 인간상은 국가간의 울타리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화 시대에 절실하다. 모든 기업들이 사람을 일회용으로 쓰다 버릴 생각이라면 ‘기능인’만으로 충분하고, 사실 지금 대부분의 우리나라 기업들은 그런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긴 안목으로 보아 좀더 미래지향적이며 생산적인 인간형을 찾는 것이 기업 자체의 장기적인 이윤추구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21세기는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고도 정보화 시대다. 물리적인 국경을 초월한 세계가 새로운 시대의 활동무대다. 이런 시대에는 어느 방향으로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인재, 전방위적 성향의 인간을 필요로 한다. 젊은이들을 탄탄한 기초지식을 갖춘 교양인으로 만든 다음 전공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나 실무능력까지 겸비하도록 해줄 것을 정부나 기업은 대학에 요구해야 한다. 그러자면 기초학문에 대한 탐구의 열기를 자극하고, 그에 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기초학문의 무덤 위에서 응용학문은 꽃을 피울 수도 없고, 국가의 발전 또한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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