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팔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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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4-04-08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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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관회[ 八關會 ]

  

정의

우리 민족의 고유 민속신앙과 불교의 팔관재계(八關齋戒)가 습합된 신라와 고려시대의 국가적 행사.

내용

팔관재계는 팔재계(八齋戒)·팔계(八戒)·팔계재(八戒齋)·팔지재법(八支齋法)이라고도 하며, 재가(在家)의 신도가 하룻밤, 하루낮 동안 받아 지니는 계율이다. 팔관의 ‘관’은 금(禁)한다는 뜻으로 살생(殺生)·도둑질·음행(婬行) 등의 여덟 가지 죄를 금하고 막아서 범하지 않음이고, ‘재’는 하루 오전 중에 한끼 먹고 오후에는 먹고 마시지 않으며 마음의 부정(不淨)을 맑히는 의식이며, ‘계’는 몸으로 짓는 허물과 그릇됨을 금하여 방지하는 것이다.

이 팔관재계는 육재일(六齋日)이나 삼장재월(三長齋月)인 1월과 5월, 9월에 행한다, 육재일은 매달 6일·14일·15일·23일·29일·30일로서, 재가의 신도들이 선(善)을 기르고 악(惡)을 막아 스스로 근신하는 포살(布薩)의 날이다.

육재일에 팔계를 지녀서 복덕(福德)을 닦는 유래는 고대 인도에서부터 기인한다. 불교 이전의 인도 외도(外道)들은 육재일이 악귀(惡鬼)가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 질병을 안겨주는 날이라 하여 이 날이 되면 목욕재계하고 오후불식(午後不食)하며 지냈다.

불교에서 이 풍습을 수용하여 출가(出家)의 수도자와는 달리, 잘못을 짓고 살아야 하는 재가의 신도들을 위해서 육재일만은 하루에 한끼만 먹도록 하였다. 그리고 인도 고유의 풍습에다 새로이 팔계를 첨가, 선을 닦고 복을 지어 흉사(凶事)를 피하게 하고 열반(涅槃)에 이르게 하는 수행의 날로 삼았다.

팔재계는 소승불교(小乘佛敎)의 최고 수행위(修行位)인 아라한(阿羅漢)이 일상으로 행하는 여덟 가지 규범(八事)이며, 불문(佛門)에 처음 입문한 사미승(沙彌僧)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사미십계 중 여덟 가지이다. 사미승이 반드시 지켜야 할 계율이면서 아라한이 되면 저절로 지키게 되는 필수 덕목(德目)으로 재가의 신도 특유의 팔관재계를 만들었다.

사미십계(沙彌十戒)는, ① 중생을 죽이지 말라, ② 훔치지 말라, ③ 음행하지 말라, ④ 거짓말하지 말라, ⑤ 술 마시지 말라, ⑥ 꽃다발을 쓰거나 향을 바르지 말라, ⑦ 노래하고 춤추고 구경하거나 듣지 말라, ⑧ 높고 넓은 큰 평상에 앉지 말라, ⑨ 때 아니면 먹지 말라. ⑩ 금·은·보물을 가지지 말라 등이다. 이 십계 가운데 제 ⑩은 세속인에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므로 제외시켰다.

아라한의 팔사(八事)는 사미십계의 ①∼⑤까지를 그대로 취하고, ⑥과 ⑦을 하나로 묶어 제6사로, ⑧을 제7사로, ⑨를 제8사로 하였다. 사미십계는 허물을 막고 도(道)를 닦아가는 데 주안점을 두지만, 아라한의 팔사는 자비와 보시(布施)와 정진(精進)의 정신을 한층 심화시킨 것이 특징이다.

팔관재계를 행하면 그 공덕으로 목숨을 다한 뒤 욕계(欲界)의 육천(六天)에 태어나서 삼악도(三惡道:지옥·아귀·축생의 세 가지 나쁜 세계)와 팔난(八難:8가지 재난. 곧, 배고픔·목마름·추위·더위·물·불·칼·전쟁)에 떨어지지 않게 되며, 오역죄(五逆罪:5가지의 큰죄)를 없애고 모든 죄장(罪障)을 소멸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팔관회는 신라시대부터 개최되었다. 사료에 나타난 신라의 팔관회는 네 차례이다. ① 551년(진흥왕 12) 거칠부(居柒夫)가 혜량법사(慧亮法師)를 고구려로부터 모시고 왔을 때 왕이 혜량을 승통(僧通)으로 삼고 처음으로 백좌강회(百座講會:百高座法會, 백 명의 고승을 초청하여 행하는 큰 법회)와 팔관회법을 설치하였다. ② 572년(진흥왕 33) 10월 20일 전사한 장병을 위하여 팔관회를 외사(外寺)에서 7일 동안 베풀었다.

③ 자장(慈藏)이 중국 태화지(太和池) 옆을 지날 때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황룡사 구층탑을 세우면 나라가 이로우리니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귀국 후 탑을 세운 다음 팔관회를 개최(645년경)하였음이 분명하다. ④ 899년(효공왕 3) 11월 궁예가 처음으로 팔관회를 개최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는 네 번의 신라 팔관회는 모두 호국적 성격을 지니며, 불교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법흥왕이 불교를 국교로 하여 행정적 중앙집권의 강력화를 추진하였으나, 진흥왕은 부족 고유의 토속신앙을 통합하기 위하여 사찰에서 재래의 산천용신제(山川龍神祭)와 시월제천(十月祭天:東盟. 추수를 끝내고 하늘에 감사하는 제사) 등을 불교의식과 합하여 신라 특유의 팔관회를 개최하였다.

팔관회를 통하여 종교의식의 단일화를 이룸으로써 중앙집권체제와 민족적 통합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었다. 신라 팔관회 의식이 행해진 절차 및 방법은 나타나지 않지만, 신라를 전승한 고려의 팔관의식으로 볼 때 순수한 불교의 팔관재계를 따른 것은 아니다. 신라의 팔관회는 10월과 11월에 개최되었다. 10월에는 고대부족국가에서 제천의식(祭天儀式)으로 동맹(東盟)과 무천(舞天:추수를 감사해 하며 춤을 추고 술을 마시는 축제)을 행하였고, 이 10월제천을 ‘새(天)’, ‘한(天)’이라 하였다.

신라에서 팔관회를 10월, 11월에 개최한 것은 고유의 농공감사제인 10월제천을 원류로 하여 재래로부터 전승된 ‘’신앙, ‘○’신앙 원시전사가무단(原始戰士歌舞團)을 불교와 합류하기 위하여 10월을 택해서 제천(祭天)·위령(慰靈)의 불교식 제사와 대회가 베풀어졌다.

이것을 신라인은 ‘○’라 하였고, 새로 전래된 불교의 영향으로 ‘○’는 ‘발간회’→‘팔관회’로 한명화(漢名化)되었다. 태봉(泰封)의 궁예는 미륵신앙(彌勒信仰:미륵불이 현세에 나타남을 기원함)에 의한 현세희구(現世希求:미륵불이 현세에 나타남을 기원함)의 불교행사로 팔관회를 변모시켰다.

고려의 팔관회는 고려 건국의 해인 918년(태조 1) 11월부터 시작되었다. 궁예가 매년 겨울 팔관회를 설치하여 복을 빈 것을 전승한 것이다.

943년에 발표한 『태조십훈요 太祖十訓要』 중 제6조에서 “내가 지극히 원한 것은 연등과 팔관이었다.……팔관(八關)은 천령(天靈)과 오악(五嶽) 명산대천(名山大川)과 용신(龍神)을 섬기기 때문이다. 뒷 세상에 간특한 신하가 가감(加減)을 건백(建白:의견을 올림)하면 일체 금지해야 한다. 내가 당초부터 마음에 맹세하여 회일(會日)에는 국기(國忌)를 범하지 않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겼으니 마땅히 공경하게 이대로 거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신라의 팔관회에 지리도참사상(地理圖懺思想)을 첨가하고 조상제(祖上祭)의 성격을 표면화시켜 천하태평·군신화합을 기원하는 민족적·호국적 연중행사로 발전되었다. 특히, 고구려의 국호를 이은 고려가 고구려의 옛 풍습인 동맹을 팔관회로 전승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태조는 918년의 팔관회를 위봉루(威鳳樓)에 올라가 관람하면서, 팔관회를 이름붙여 ‘부처를 공양하고 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供佛樂神之會)’이라 하였다.

팔관회의 개최일은 서울인 개경에서는 11월 15일, 서경에서는 10월에 팔관휴가로 전후 3일을 주었다. 간혹 개최일에 변동이 있어, 1083년(선종 즉위년)에는 문종의 국상(國喪) 때문에 12월에 설하였고, 1200년(신종 3)과 1357년(공민왕 6)에는 불길한 날로 보는 묘일(卯日)을 피하여 11월 14일에 열기도 하였다.

개경의 팔관회는 소회일(小會日)과 대회일(大會日)이 있어 대회 전날인 소회에는 왕이 법왕사(法王寺)로 행차하는 것이 통례였고, 궁중 등에서 하례(賀禮)를 받고 이어 헌수(獻壽), 지방관리의 축하선물의 봉정(奉呈) 및 가무백희(歌舞百戱) 등의 순서로 행하여졌다. 대회 때도 역시 축하와 헌수를 받고 외국 사신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법왕사는 919년(태조 2) 국가의 융성을 불법(佛法)에 의지하고자 개경 내에 10찰(刹)을 세울 때 수위에 둔 사찰로서, 비로자나삼존불(毘盧遮那三尊佛)을 주존으로 봉안한 절이며, 신라의 황룡사에 해당하는 호국사찰이다. 왕이 가장 먼저 법왕사에 행차한 것은 불법에 의한 호국을 염원하는 한 표현이었다.

10월에 열린 서경의 팔관회는 서경의 지덕(地德)과 함께 중요시되었다. 서경의 팔관회는 조상제의 성격을 띤 예조제(藝祖祭)로서, 초기에는 조정에서 반드시 재상(宰相)을 파견하여 재제(齋祭)를 행하게 하였는데, 한때는 삼품관(三品官)을 보냈으나 1181년(명종 11)부터 다시 재상을 파견하였다. 팔관회에서 가무백희를 연출함은 신라 때부터의 일이었으나, 고려에서는 팔관회를 하늘과 부처에게 기도하는 국가최고의 의식으로 삼아 가무백희를 꾸준히 발전시켰다.

왕은 팔관회일에 위봉루나 신봉루(神鳳樓)에 나아가 풍악을 관상하였는데, 많은 명기(名妓)들도 참가, 합석하였다. 이때 포구락(抛毬樂)·구장기별기(九張機別技)·왕모대가무(王母隊歌舞) 등의 팔관가무를 공연, 종합가무대회의 구실도 하였다. 특히, ≪고려사절요≫의 인종 10년(1132)조에 의하면, 일찍이 김부일(金富佾)이 지은 팔관치어구호(八關致語口號)를 예종이 보고 크게 기뻐하여 조서를 내려서 상용(常用)하도록 하였다.

송나라 음악가 기중립(夔中立)이 고려의 악관(樂官)으로 있다가 송나라로 돌아가서 가사를 황제 앞에서 외었더니, 팔관치어구호를 보고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이다.’라고 격찬한 기록이 있다.

팔관회장의 정경은 시대별로 가감이 있으나 태조 1년의 행사를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원형(圓形)의 정원 한 곳에 윤등(輪燈)을 설치하고 향등(香燈)을 곁에 벌여놓아 밤이 새도록 땅에 광명과 향기가 가득하도록 하였고, 높이 50척이 되는 연화대(蓮華臺) 모양의 채색된 누각을 설치하여 멀리서 보면 아른아른하게 하였다.

갖가지 유희와 노래와 춤을 그 앞에서 벌였고, 신라의 고사(故事)를 따서 사선악부(四仙樂部)의 용(龍)·봉(鳳)·코끼리〔象〕·말〔馬〕·수레〔車〕·배〔船〕를 표현하였다. 모든 관원이 도포를 입고 홀(笏)을 들고 예(禮)를 행하였는데, 구경하는 사람이 서울을 뒤덮어 밤낮으로 즐겼다. 그리고 11월은 팔관회를 기회로 무역이 행하여졌고, 송나라 상인과 동번(東蕃)·서번(西蕃)·탐라(耽羅)에서는 토산물을 바쳤는데, 1034년(덕종 3)에는 그들도 함께 앉아 예식을 보게 하여 그 뒤의 일정한 절차가 되게 하였다.

또 팔관회일에는 죄인의 대사면(大赦免)을 내리기도 하였다. 팔관회를 주관하는 관청은 팔관보(八關寶)로서, 팔관회의 의식비용(儀式費用)을 충당하기 위하여 문종 때 설치하였다. 관원으로는 4품 이상의 사(使) 1인과 5품 이상의 부사(副使) 2인, 판관(判官) 4인, 이속(吏屬)으로 기사(記事) 2인, 기관(記官) 1인, 산사(算士) 1인을 두었다.

팔관회의 폐단이 때때로 있었다. 982년(성종 1) 3월에는 최승로(崔承老)가 소(疏)를 지어, 겨울의 팔관에 사람을 많이 동원하고 노역이 번다하고, 한번 사용하고 부수는 우인(偶人) 등에 공비(工費)가 많이 들고, 또 중국에서는 우인을 흉사에만 사용한다는 이유로 시정을 요구하였다. 그 해 11월 왕은 팔관회가 잡되고 도리에 맞지 않으며 번거롭다 하여 모두 폐하게 하였고, 987년에는 서경의 팔관회도 폐지하였다.

1010년(현종 1)에 최항(崔沆)의 청으로 다시 부활되었으나, 1115년(예종 10)에는 배우들에게 명하여 왕의 의장(儀仗) 안에서 노래하고 춤추기를 삼경(三更)까지 하였다. 1120년 어사대에서 아뢰기를 “요즘 풍속이 날로 사치하고 기물(器物)이 화려하며 상하가 차별이 없으니, 옛 제도에 의하여 엄하게 금지하자.”고 하여 왕이 좇았고, 추밀원(樞密院)의 과일탁자가 제도에 지나쳤다 하여 담당 집사(執事)를 구금하였다.

1146년(의종 즉위년)에는 전상(殿上)에서의 여악(女樂)을 금지하였다. 1179년(명종 9) 11월 재상 최충렬(崔忠烈)이 팔관경비의 폐해와 팔관회 때 백관의 과일상, 복식의 절제 없음을 들어 일체 금지하기를 건의하므로 왕이 이에 좇았다. 1181년 최충렬이 서경의 팔관회에 다시 재상(宰相)을 보내어 팔관회를 대행시키자고 건의하므로 왕이 좇아 그를 보냈더니, 돌아올 때 그는 선물을 실은 수레 30여 량을 성안으로 들여와 사욕(私慾)을 만족시켰다.

1188년 이순우(李純祐)가 팔관회 때의 전약(煎藥)으로 쓰려고 송도·서경·남경·동경의 백성들이 젖소를 모아 젖을 짜서 연유(煉乳)를 만들기 때문에 암소와 송아지가 상하게 되고 경작에 필요한 소가 손상됨을 들어 폐지하기를 청하자 왕이 받아들이니 백성들이 감격하였다는 기록 등이 전한다.

팔관회는 고려 500년을 통하여 여러 번 변화와 성쇠가 있었는데, 대체로 초기에 성하였고 현종 이후에는 점점 쇠퇴하였으나, 고려 말까지 팔관회는 국가최고의 의식으로 계속되었으며,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에 천도하였던 시기에도 이 의식은 행하여졌다. 조선 초기에는 잠시 보이다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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